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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Dear Diary

출애굽기1장

출애굽기 설명

[1-7]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시대의 사람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한글 번역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히브리 원문에 따르면 출애굽기의 글자는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것은 출애굽기가 독립된 단행본이 아니라 앞선 , 창세기의 연속이라는 점을 알린다. 창세기의 주요한 이야기들의 흐름의 연속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창세기의 주요한 이야기들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출애굽기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을 것을 권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족장중의 족장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위대한 약속을 주셨다( 12:1-3).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사실 축복의 약속은 인류 최초의 족장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선언의 반향(反響)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1:28). 또한 창세기의 마지막 족장인 야곱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피치 못하게 애굽에서 이민 생활 하지만, 그들에게는 땅이 약속의 땅은 아니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 잠정적으로 살뿐 그곳이 영원한 고향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야할 고향이 있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지역이었다.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과 그의 자손들의 출애굽은 필연적인 순서이고 따라서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이 피력한 고향에로의 갈망은 출애굽을 예기한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50:24-25).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출애굽기의 본디 제목은이름들’(쉐모트’)이다. 출애굽기 1 1절의 히브리어 서두를 그대로 책의 타이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들은 이러하니라”(‘베엘레 쉐모트’). 출애굽기의 본래 제목이이름들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신학적 성찰을 자극한다. ‘이름들 1 2절에 있는 것처럼,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열두 자녀들의 이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제목으로서이름들‘(출애굽기서) 우리에게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게 이름들 대해 귀를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독특한 목적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3장과 6장에서 우리는 신비스런 이스라엘 하나님의이름 관해 듣게 된다. ‘야웨 이름이다. “나는 나다!” 혹은네가 어디에 있든지 바로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실질적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름은 박해와 고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좋은 소식’(福音) 자체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출애굽기에서모세라는 이름을 수없이 듣는다. ‘건짐을 받다 뜻의 모세라는 이름은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다.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구원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을 통해, ‘탈출해방구원이란 출애굽기의 주제들이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뿐 아니라 독자들은 중요한 예전적 절기인유월절이란 이름을 접하게 된다. 애굽으로 상징되는 암흑과 죽음에서 민족을 세우는 절기 말이다. 죽음과 암흑의’()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역사는 작은 민족 관한 역사이며, ‘은혜와 진리 가리키는 표적의 역사다. 역사 부르는 암울과 혼돈과 혼란의 와중에서새로운역사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열두 명의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은 마치 신약에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의 부르심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와 흡사하다. 야곱의 아들들 열두 명의 이름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수가 모두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정확한 숫자라기보다는 대충적인 숫자로서 야곱의 자녀들을 모두 포함한 완전한 숫자, 이상적 숫자라는 의미가 강하다물론 70명으로 맞출 수는 있다. 46장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70명의 야곱의 자손들의 명단과 숫자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27, 참조 10:22). 한편 행전 7:14 의하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손들은 모두 75명이었다고 기록한다.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있는 칠십인경(Septuagint = LXX) 46:20 므낫세와 그의 아들들, 에브라임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에브라임의 손자 하나를 포함하여 모두 5명을 더해 75명이라고 한다. 아마 이것이 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족장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한 숫자이다. 어쨌든 70명에 대한 언급은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자손의 적은 숫자가 후에 애굽의 충만하게 번성하게 되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약속의 위대한 성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7절은 6절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다시 말해 7절의 첫마디는 6절의 내용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반의적 접속사그러나 시작한다(아쉽게도 한글 번역에는 접속사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7절을 시작하는 반의적 접속사(‘그러나’) 살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시대 사람은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6,7). 6절과 7 사이에 렘브란트적인 극명한 대조가 있다. 죽음과 생명이 글자 하나(‘그러나’)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죽음과 생명의 연결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죽음을 가리키는 문구요셉은 죽었다 생각해 보자. 창세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맺고 있는지 기억하는가? 끝은 이렇다. “요셉이 일백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 하였더라”( 50:26).


창세기의 글자는 히브리어로태초에’(‘베레쉬트’)이다. 반면 창세기의 마지막 글자는 히브리어로애굽에서’(‘바미쯔라임’)이다. 요셉의 죽음과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이야기로 창세기는 종결한다. 성경의 번째 책은 창세기(創世記) 시작해 멸세기(滅世記) 끝이 난다. ‘생명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죽음에 관한 암울한 기사로 끝을 맺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한 창조의 생명이 애굽에서, 시신을 담는 죽음의 ()으로 끝나고 있다. 따라서 남아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죽음이 마지막인가?” “도대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 이후에 생명은 가능할 것인가?” 요셉의 죽음 후에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중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출애굽기는 요셉의 죽음이창세기 결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7절의그러나이후에 기록된 내용은 마치 창세기 1장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7). 분명히 구절은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킨다(21,22). 그러나 땅에서의 번성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죽음 이후에도 생명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그리고 대답은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좌우간 여기에서의 문제는 자연적인 생명력이나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의 장소인 애굽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창조가 본래적 의미를 갖는 것이 이것이다. 성경은 이론적인 차원에서무에서 창조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인가? ‘창조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 진정한 의미에서창조 아니겠는가? 바로 이곳에서, 죽음의 장소인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생명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야곱의 허리로부터 생명의 번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허리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맞아 절름거리던 힘없는 허리가 아닌가! 무능력의 허리, 도저히 자녀를 생산할 없는 허리에서 무수한 생명의 번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무에서의 창조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0명으로 구성된 가족으로부터 위대한 민족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은 실제적으로 요셉의 죽음이후 적어도 4대가 지난 세월을 가리킨다. 요셉의 형제인 레위의 4대손이 모세이기 때문이고( 26:58) 모세 당시에 이스라엘 자손은 숫자가 상당히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이라 함은 이스라엘 자손이 살았던 고센 지역을 가리키겠지만 출애굽기의 저자는 문학적 과장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우주만물의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21,22) 특별히 이스라엘의 족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 12:2; 26:4; 28:14) 구현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백성에게 이르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의 출현은 요셉 시대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흘러 애굽의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음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가리키는 왕조가 정확하게 어느 왕조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애굽인이 아닌 이방 종족으로 셈족 계통인 힉소스 족이 지배했던 17왕조로부터 애굽인으로 애굽을 다스렸던 18왕조(주전 1570-1310) 거쳐 19왕조(1310-1200) 이르기까지 다양한 왕조가 후보자일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본문에서 가리키는 왕이 아모세 1(1580-1559) 창건한 18왕조의 투트모세 1(1539-1514) 가리키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2세기 후인 19왕조의 람세스 2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경우 모두 애굽 바로는 히브리 민족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박해는 심해졌다. 그렇다면 언제 출애굽이 일어났으며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정확하게 찾아낼 있는가? 여기서도 크게 가지 주장이 있다. 출애굽 초기 연대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18왕조의 아멘호텝 2(주전 1450-1425), 출애굽 후기 연대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19왕조의 람세스 2(주전 1279-1213) 지목한다. 그러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9-10) 일반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염두에 기술은 아닌 듯하다.


출애굽기 12:40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체류한 기간이 430년이나 되었으니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굽인들에게 사실은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음에 틀림없다(9-10). 그러므로 지혜자들과 현자(賢者)들의 나라였던 애굽 왕이우리가 그들에 대해 지혜롭게 하자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다루기 위해 그들이 짜낸 지혜로운 방안은 무엇이었나? “이스라엘 자손이 숫자적으로 많고 강해진다”(9) 그들이 우려했다면, 애굽 왕과 그의 현자들이 짜낸 지혜로운 방안은 이스라엘의 인구를 억제하거나 말살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과된 고역,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도시와 성을 짓게 (11) 실제적으로는 인구 감축이나 삭감을 목적으로 것으로 추측된다. “애굽인들은 고된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살시키기 원했다라고 요세푸스는(『유대 고대사』2:203-204)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결국 어리석은 결정에 이른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내뱉은 언사(“ 백성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 “그들이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그에 따르는 결정(“바로를 위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의 심각한 정치적 오판을 반영하는 어리석음이었다. 그의 말은 민족이 다른 민족을 대항하도록 촉구하는 선동적인 언사였으며,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위에 기름을 붓는 말이었다.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여라는 문구는 출애굽기의 돋보이는 주제이다. 바로의 언급은, 헤롯왕이 유대의 왕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2장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헤롯은 자기가 유대의 왕이었음에도 유대의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2:1). 


고대 세계에서 비돔과 라암셋과 같은 대규모 도시를 건축한다는 것은 평민들과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바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여 땅에서 번성하는 것을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이스라엘 자손이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생명력이 강한 질경이처럼 이스라엘은 짓밟히면 밟힐수록 더욱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번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약속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던 고센 지역 가까이에 바로의 비돔과 라암셋을 세운 것은 나일 하류의 델타 삼각지의 동쪽 경계 지역을 보호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다시 말해 북쪽과 북동쪽으로부터 애굽을 침공하려는 세력들을 차단하고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한글번역에는 국고성(國庫城, store cities)으로 되어 있다. 곡물과 같은 재화를 보관하는 창고형 도시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참조, 왕상 9:19; 대하 8:4-6; 17:12-13; 32:27-28). 출애굽 후기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라암셋이라는 도시 이름을 보아 도시가 라암셋 2세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애굽 초기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본문에 라암셋이란 이름이 기록된 것은 이미 이전에 건축되었지만 후에 폐허가 도시를 라암셋 2세가 중건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창조의 축복과 은총 족장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1:20,28; 9:1,7; 17:2; 18:18; 28:14; 48:4) 아래번성하고 있는 모습을 다섯 번에 걸쳐 강조한다(7: ‘중다’, ‘번식’, ‘창성’, ‘강대’, ‘가득’). 그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의 고역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점진적으로 강조한다. 강제로 징발된 노동(11-12)에서 노예제도의 집행으로(13-14), 새로 태어난 남아들을 살해하는 비밀지령(15-21)에서 공개적인 인종 말살 시도로 이어진다(22).


이것은 강한 것과 강한 사이의 부딪힘이 아니다. 골리앗과 다윗 간의 싸움이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 연약한 민족에 대해 생명과 힘으로 넘치는 강한 자의 압제다. 출애굽기의 머릿장은 바위틈을 뚫고 생존하려는 연약한 뿌리가 외부의 강한 압제와 억압에 의해 좌절되고 짓밟히는 모습을 여러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연속적인 묘사 안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인들이강성하고 번성하기’(7) 시작하자 그들에게는 국고 사역을 담당하게 하는 고역의 짐이 지워진다(8). 비돔의 신전 건축과 라암셋의 왕궁 건축에 혹독한 착취를 당하게 된다(8 이하). 그러나 우리는 학대 속에서도 다시금 이스라엘이강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12). 그러나 바로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의 고역을 가중시켜(13절의 다중 고역), 그들에게 주어진하나님의 축복과 은총번성 짓누른다. 그러나 그런 고역에서도 이스라엘인들에게는생명의 강인함과 강성함 있었다(19-20). 반복적이며 점층적인 이런 에스컬레이션은 바로의 최종적 명령에서 절정을 이룬다. 히브리 인종의 전멸이라는 인종 말살 정책의 선포다. ‘대학살'(Holocaust) 원형이 여기 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의 무시무시한 물속에 던지라!”(22).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출애굽기 1장의 이야기 안에는 반복되는 리듬이 있다. (1) A (번성) B (압제); (2) A (번성) B (압제); (3) A (번성) B (압제). 보다시피, 이야기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항상 B 마지막이라는 사실이다. 속에 긴장감이 있다. B 정말로마지막 인가?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얼마동안 뿐이다. 그리고 단어는(‘얼마동안’, ‘잠정적’)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배우게 되는 중요한 단어다. 죽음도얼마동안 이기 때문이다. 암흑도 잠시 후에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얼마동안안에 있다. 아직도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얼마동안 지나면 반드시 새로운 미래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얼마동안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있다. 시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일이 있다. “그의 노여움은 잠간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머물러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15-22]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장은 우리에게 가지 중요한징조표적’(sign) 던져준다. 특별히 산파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서다. 어린 남아를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은 이야기의 부분에 있다. 그런데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 그것도 매우 유머러스하게 바로의 명을 받아친다. 서슬 퍼런 바로의 명령에 떨면서도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담대하게 농담을 건네고 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나이다.”(19)


자조 섞인 듯한 말이다. 히브리 여인들은 덩치가 크고 건장하여 아이를 쑥쑥 낳는다는 것이다. 진통이 시작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출산한다. 따라서 산파가 도착할 만큼 시간적 여유는 있는 법이다그런데 히브리 여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면 곧바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거침없이 바로 앞에서 내뱉을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사실상 산파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일부러 태만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태업이라 있다. 아니면 일종의시민 불복종이라 있다. 그녀들의 변명을 다시 들어보자.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나이다.”(19)


분명히 대답은 매우 코믹하다. 난센스처럼 들린다. 보고(報告)라기보다는 일종의 저항적 선언과 같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대답은 진정한 의미에서창조의 노래. 새로운 언어로 창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공포의 면전에서 공포를 저항하면서 불렀던창조의 노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히브리 여인들은 너무나도 생명력이 강했습니다…”라고.


이스라엘인들은 훗날 눈물을 머금으면서 조용히 구절을 되뇌었다. 위대한 초강대국들 애급,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왜소함을 절감할 그들은 노래를 읊조렸다. 노래는 그들이 직면했던 암흑과 혼돈과 죽음에서 능히 그들의 신앙을 지탱시켜 주었을 아니라 넉넉히 이겨 나갈 있는 힘을 공급해준 원동력이었다. “그녀들은 너무나도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애수에 노래, 창조의 노래 불렀던 그들은 확신 속에서 남모르는 눈물을 머금었다. 결코 슬픔의 눈물이 아닌 확신의 눈물을, 그리고 눈물너머에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떠오르는 미래를 바라볼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노래와 함께하나님을 두려워하는산파들을 기억해야한다. 성경 저자는 십브라와 부아라는 히브리 산파를 거명한다.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에 관해 하계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이 히브리인 인지 아니면 애굽인 인지에 관해 의견이 갈린다. 애굽인일 경우 히브리인 거주 지역을 담당하는 산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보니 셈족 이름이며 애굽 이름은 아니다. 참고로, 십브라는아름다움이란 뜻을, 부아는처녀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보니 히브리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십브라 조산원과 부아 조산원의 원장이었을 것이다. 당시 애굽에 거주했던 이스라엘인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십브라와 부아 말고도 상당수의 산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었다.


본문이 그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은작은 자들연약한 자들 멸절하는 잔악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점에서 그들은 아말렉과 대조가 된다. “아말렉은작은 들을 멸하였고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한 들이었다”(25:18!). 그들은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단호히 거역한 신앙의 여인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국가에 대해 저항한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하여 합법적이고 정당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신앙의 전당(殿堂) 각인되어 천추(千秋) 길이 남는 신앙의 (star)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진리는 딸들이 아들들을 구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독특한 방정식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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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처음에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부담이 안되었는데.. 점점 부담이 되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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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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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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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야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주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바라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은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헝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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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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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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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집안이 번성케된다? 하나님의 은혜란 결국 물질적인 것인가?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그게 은혜인가? 

 집안이 흥왕하지 못하면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인가? 

 : 근데 이 부분은 번역이 좀 이상한거 같다. 영어로는 he gave them families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 산파들은 가정이 없는 독신이었다. 

 2. 산파들이 원하던 것은 가정이었다. 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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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를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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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한 말과 동일한 말 아닌가. 애굽왕 (이집트왕) 이 죽이라고 했는데, 직접 죽이지 말고 강에 던지라.. 이런건가? 

 하지만 여기서 모세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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