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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살펴본 기독교신앙의 배타성과 그 참 의미



 시오노 나나미가 쓴 열다섯 권의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2007)는 재미있고 잘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어떻게 세계국가로 성장해 마침내 그토록 거대한 영토(유럽 대부분과 사하라 이북의 아프리카, 그리고 중근동)를 그토록 오랫동안(500년간이나!) 다스릴 수 있었는가를 추적한다. 저자는 주전 753년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과 주전 509년의 로마공화정 시작(브루투스), 주전 27년의 옥타비아누스의 제정(帝政) 시작 등 로마사의 중추적 사건들을 공화정과 제정의 창조적 갈등의 빛 아래서 해석한다. 특히 전반부(1~7권)에서 저자는 로마를 원로원과 민회 중심의 공화정으로 통치할 것인가, 아니면 군권과 정치권력을 독점한 1인 황제의 통치력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두고 로마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저자는 1천 년 이상 존속된 로마의 역사(476년에 망한 서로마까지)를 이후에 전개될 서구 정치의 원리들을 범례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열다섯 권 전체에 걸쳐서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통치자의 부단한 희생, 피지배 민족까지 동화시키는 융합 정신, 원칙과 가치를 지키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실용 정신, 그리고 민중 지향적 공정성을 특징으로 한 법치주의 등 로마가 세계국가로서 인류사에 남긴 유산을 잘 소개하고 있다. 로마의 문명사적 성취와 관련하여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사실 중 하나는 다신교적․다원교적․다문화적․다인종 사회를 가능케 한 로마의 법치주의가 로마제국의 성공적인 세계 통치의 조건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나미는 이렇게 멋진 로마제국이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배타적 유일신신앙을 가진 기독교의 로마 황실 접수라고 본다. 로마 전통 신들은 물론 다른 이교도(심지어 유대교)의 존재도 용납하지 않고 모조리 기독교인화하려는 기독교의 과도한 선교 열정 때문에 로마의 다원주의적 관용 정신, 즉 로마의 황금률같은 문명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다신교적 세계관을 가진 나나미는 7권부터 로마의 아름다운 다신교적‧다원주의적 세계관이 기독교적 배타성에 의해 어떻게 침식되어 가는가를 부각시킨다. 


로마적 ‘다원주의’와 충돌한 ‘배타적’ 기독교


7권 <악명 높은 황제들>은 기독교 일신교신앙의 배타성 표현의 예후라고 볼 수 있는  66~73년의 유대 전쟁을 소상하게 다룬다. 저자는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대파국적인 소멸과 추방으로 끝난 유대 전쟁을 로마적 다신교 세계관과 유대교의 편협한 일신교신앙이 충돌한 사건으로 본다. 유대교도들이 로마의 다문화적‧융화주의적 세계국가 이상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유일신신앙으로 운영될 신정국가를 정립하려는 열망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저자는 로마제국의 종교 관용, 다원주의적 세계관이 유대교의 일신교적 배타성보다 더 나은 문명 질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사 전체에서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로마의 다원주의는 로마제국의 국가에 바쳐진 충성심이라는 배타적 가치를 떠받드는 다원주의요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로마는 국가주의 종교의 나라였고 로마제국의 수도 황궁 언덕과 공공건물 중심지에 건립된 제우스 신전이나 비너스 신전 등 신전들은 로마가 외견상 다신들의 제의를 허용하는 듯하지만 실상 로마제국의 존립과 번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국가 숭배 종교라는 배타적 이념을 표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라는 배타적 구원자에 대한 숭배 이것이 로마 다신교 제의의 본질이었는데 나나미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 점은 9권 <현제의 시기>에서 잘 드러난다. 98년부터 117년까지 로마를 다스린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소아시아 비티니아 총독 소(小)플리니우스 공문 서한에 보면 트라야누스와 지방 속주 총독 둘 다 기독교도를 로마제국의 안정과 통일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범죄자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라야누스법으로 알려진 황제 포고령은 기독교도의 신앙의 본질적 가치를 문제시하기보다는 로마제국의 안녕과 질서 유지에 해를 끼치는가를 중심으로 기독교신앙인의 탄압 여부를 결정했다. 

    

11권 <종말의 시작>은 로마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로마 대중의 점증하는 적의를 보도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66~167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덮친 페스트와 당시에 점고되던 북방 민족의 위협 등으로 우울해진 제국의 수도 로마인들의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국가 주도의 제사를 드렸다. 당시 로마시의 변경이었던 12, 13, 14구에 거주하던 기독교도들이 로마의 전통 신들에 대한 충성 갱신 의례에 불참하자 로마인들의 반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도들은 ‘아테오’, 즉 신이 없는 자로 불리게 된다. 이 당시 기독교도들에 대한 로마 대중의 반감과 적의가 심화된 또 한 가지 이유는 기독교도들이 병역 의무에 소극적이거나 중앙정부 또는 지방에서 이뤄지던 공공사업이나 복지사업에 불참했기 때문이었다(138~139쪽). 로마의 전통 신 참배자들의 눈에 기독교도들은 신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로마체제 밖에 살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타락한 로마 사회에 참여하면 천년왕국의 도래가 지연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에서 나나미는 마치 자신이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법의 대변인이 된 것처럼 로마의 다신교적 관용과 기독교의 일신교적 배타성을 비교하며 기독교신앙의 배타적 완매(頑昧)성을 꼬집는다. 40세에 황제가 되어 로마 사회에 규율을 회복시키려다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 중 1인이 된 데키우스는 성직자뿐 아니라 일반 신자들까지 탄압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명기한 증명서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250년). 로마제국 내의 도시나 마을에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불려 나간 시민들은 로마의 전통 신들 형상에 참배하고 그 앞에서 연기를 내고 있는 재 위에 향료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야 했다(제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람들은 향료가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자기는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선언해야 증명서가 발급되었다(232쪽). 3세기 중엽 기독교도들에 대한 로마 대중의 혐오감을 바탕 삼아 일반 기독교 신자까지 탄압했던 데키우스 황제를 변호하며 나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230쪽).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과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도를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다신교 민족이다. 다신교는 많은 신을 믿는다기보다 다른 신을 믿는 사람도 인정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어떤 신을 믿든지 간에 그 자체는 죄가 되지 않았다. 다만 믿는 사람들끼리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취하면 죄가 되었다. … 현명한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렸다는 이유로 후세가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게 된 시대에도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진 것은 로마 황제들의 기독교도 탄압이 신앙 탄압이 아니라 반사회적 활동에 대한 탄압이라는 증거다. 하지만 탄압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남에게 퍼뜨리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하고 실제로 그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계급이었다. 


그녀는 기독교도들이 “현세의 지배자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로마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할 수 없다는 기독교회쪽의 생각에는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한다”(257쪽). 일신교도인 기독교도가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한 것은 로마 황제가 곧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는 로마 황제에게 향을 피우는 것은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행위일 뿐이다. 로마제국 황제상은 신상이라기보다는 주민공동체인 로마제국의 상징이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대립은 종교 항쟁이 아니라 문명 대립”(258쪽)이라는 것이다.

    

258년에 데키우스를 뒤이어 제위에 등극한 발레리아누스는 로마 전통신들에게 바쳐지는 제의를 거부한 기독교 성직자는 추방하거나 사형시킨다는 정책을 발포하고 처음으로 교회와 기독교도의 재산을 몰수하는 정책을 도입한다. 하지만 페르샤 국왕 샤푸르의 공격 때문에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탄압은 중단되고 이후 45년간, 즉 303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시까지 기독교회는 평화를 누린다. 하지만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등장한 디오클레아티누스는 기독교신앙을 반사회적 범죄라고 보는 트라야누스법의 극한적 집행자가 된다. 그는 자기의 절대정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위임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에게서 구한다. 특히 로마가 숭배하는 30만 명의 신들 중 최고신 유피테르가 수여한 권위에 호소했다(제 13권 <최후의 노력>, 127쪽). 그는 몇 차례에 걸쳐 로마제국 재건 작업을 진두지휘하며, 그 대미를 로마제국 질서에 항구적인 도전 세력으로 떠오른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장식한다. 12권에서도 보았듯이 3세기 중엽 이후 로마 재건에 투신한 황제들은 모두 기독교 탄압에 열을 내었다. 로마의 전통 신들을 믿지 않으면 로마제국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다신교도들인 로마 대중들은 일신교도인 기독교도들이 자기들의 하나님만 인정하고 나머지 모든 신들을 비신격화하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기초를 허물어뜨린다고 생각했다(136쪽). 


303년 2월 24일에 선포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칙령으로 가장 철저하고 파괴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회는 토대부터 파괴되었고, 신도들의 모임은 엄금되었으며 미사, 장례식 등도 금지되었다. 성서나 미사 도구 등 모든 교회 관련 물건들이 소각되었다. 기독교도는 재판을 받을 때도 로마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신도들의 기부를 통해 축적된 교회 재산은 몰수되어 지방단체나 직능단체에 기부되었다. 모든 기독교도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이 박해 포고령과 함께 뒤이어 공포된 후속 칙령들은 로마의 다신교가 사실상 다원주의적 관용 종교가 아니라 로마국가주의라는 배타적 유일신신앙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투옥된 성직자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셋째 칙령과 고발 없이도 익명으로 기독교도를 색출해 처벌하라는 넷째 칙령은 가장 비로마적이고 잔혹한 강압 조치였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배타적 유일신신앙을 보유하고 있으나 누구에게도 강제로 야훼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나미가 그토록 예찬해 마지않는 로마는 기독교도들이 로마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하도록 강요했으며 거부자는 사형이나 강제 노동에 처했다(13권 139~140쪽). 이 사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합동으로 공포한 밀라노칙령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신하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의 정책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246쪽). 기독교가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끄는 제국 통합적인 기능을 맡아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국가유일신 종교는 본질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전통신들 대신 기독교도의 신에 기대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 것이다. 밀라노칙령 이후에 기독교신앙은 원래의 순수한 배타성 대신에 로마 국가 종교가 보유하던 사악한 배타성을 상속함으로써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 배타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로마 전통 종교나 유대교에 대한 물리적 폭압이나 유린을 감행하는 전투적 배타성을 드러낸 것이다. 


비주류적, 공익적 배타성에서 타자 배제적 배타성으로 변질된 기독교신앙


로마제국이 전통 신들을 신봉하는 국가 종교 제의 아래 유지되고 있을 때에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고도의 윤리적 순수성과 결합되어 있었으나,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의 배타성은 종교 권력의 보루를 의미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진흥책의 일환으로 콘티탄티누스는 자신의 사유재산을 교회에 기부했으며(319쪽) 성직자를 비과세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로마제국 전역에 거짓 개종자들을 양산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교회 역사가 교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도 신앙보다 이익을 얻기 위해 입문하는 자가 많음을 개탄하고 있다. 결국 콘티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진흥책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되었음이 드러난다(344쪽). 로마의 전통적 신들은 4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이라는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이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위임으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천상천하의 대주재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스린다는 신학적 인식이 주입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배타적인 로마 국가 종교의 최고 제사장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의식은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로마의 전통 신들의 제의를 주관했고 제국의 안정과 통일 유지에 혼신을 다했다. 그의 핵심 관심은 로마제국의 국가적 존엄과 통치권 유지였다. 

    

그의 후임자인 콘스탄티우스 황제(337~361년)는 기독교의 특권화를 가속화하고 확장하였으며 반면에 그의 후임자인 율리아누스(361~363년)는 기독교의 비특권화와 로마 전통 종교의 부활을 추구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성직자의 사유재산 보유를 인정했고 모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제우스, 포세이돈, 신격 군주들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등 초상화나 부조상들은 우상으로 단죄되었고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 시리아의 태양신전도 폐쇄되었다. 로마의 전통 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잇달아 폐쇄되었다(103~104쪽).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우스 부자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단계를 넘어, 기독교를 우대하고 특권화했으며, 로마의 전통 종교를 배격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마침 이 시기에 이집트 성자 안토니우스가 죽었는데(356년) 106세까지 장수한 이 성자의 언행록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것은 아리우스파에 대한 열정적 단죄로 가득 차 있었다. 이처럼 배타적인 기독교 교권이 로마 황실을 장악하자 로마제국 자체도 점점 배타적이 되어 갔다. 로마제국의 전성기 때에 보였던 기독교도의 일신교적 배타성보다 지상의 세속 권력과 야합한 기독교회의 배타성은 거의 폭력 수준으로 표현되었다. 종교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교회는 탐욕과 오만의 교차점이 되었다. 탈세를 위해 성직자 직업군으로 탈출하는 자들이 속출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부자의 성직자 면세 정책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들이 기독교도화되는 추세가 가속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74~397년)에게 영향을 받은 기독교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뒤이은 치세는 배타적 기독교신앙의 부정적 면모가 절정에 도달했던 시점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부터 395년까지 15년 동안 로마의 전통 종교 배척과 이단 배척을 위해 15가지 칙령을 공포했다(340쪽).

    

자신의 통치에 저항하던 반란군을 제압한(388년) 44세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처음 로마를 방문해 원로원을 소집해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372쪽). “로마인의 종교로서 그대들은 유피테르가 좋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좋다고 보는가?” 이 질문 앞에서 전통적인 로마제국 다신교의 보루인 원로원이 이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 앞에 무너진다. 기독교의 국교화가 시작된 것이다. 건국 초기부터 로마인과 함께 걸어온 원로원은 1141년 만에 기독교에 항복하고 이 시점을 전후해서 원로원 대다수가 기독교도가 된다. 자결한 원로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고대 예술품과 문예물도 함께 희생되었고 도서관들도 폐쇄되었다. 고대의 숱한 장서들을 포함해 고대의 지적 유산 상당수가 소멸되었다. 393년에는 유피테르 신에게 바쳐진 제의였던 올림픽도 금지되었다. 주전 776년에 시작된 유피테르 제전이 1169년 만에 종결되었다. 393년은 다신교적․다종교적 그리스-로마문명이 사망한 해라고 평가된다. 

   

“배타적” 기독교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비판과 오해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신교적 관용으로 통치하던 로마제국과 배타적인 기독교의 갈등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적인 평가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1~8권까지에 다뤄진 제정 초기와 중기까지의 로마 역사에 대한 나나미의 평가와 서술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배타적 기독교신앙에 대한 나나미의 이해가 상당히 피상적이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나나미는 313년 이후의 기독교회가 드러낸 배타성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제국 초기의 기독교도들이 보여 준 배타성을 재단하는 오류를 범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의 배타성은 기독교신앙의 순수성이 배제되고 권력 기구화된 제국의 통치기관으로 전락한 기독교회의 배타성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야 한다. 


1~4세기 초까지의 기독교회는 배타적이었으나 자신의 신앙 윤리와 지조를 지키기 위한 배타성이었다. 소플리니우스의 보고서에서 보듯이 제국 초기 기독교인들의 결사나 맹세 등 어떤 것에도 유해한 것은 없었다. 로마제국의 전통 종교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곧 로마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판단했지만 트라야누스 이래 어떤 로마 황제도 기독교인들의 직접적인 반사회적 행위를 잡아내지 못했다. 율리아누스도 인정했듯이, 4세기경에는 로마 시민사회나 전통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회가 당시에는 종적도 감추고 있던 로마공화정 시대의 공공정신, 희생적 시민부조정신 등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 14, 15권이 잘 보여 주듯이 기독교는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이래 특권적 종교 권력으로 로마 황실과 상층부를 장악함으로써 부정적인 의미의 배타성을 노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로마 전통 종교에 대한 무차별 파괴와 배척, 로마의 예술품들과 문예 유산에 대한 몰지각한 소멸, 그리고 유대교에 대한 차별과 압제 등에서 배타적 우월감을 과시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인 이야기>에 나타난 나나미의 기독교 배타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313년 이후의 기독교가 보여 준 배타성에 대한 비판으로 수용할 수 있으나, 유일신신앙 자체가 갖는 배타성에 대한 비판으로는 수용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신앙은 배타적인 외양을 띠고 있으나 보편적인 공익을 위한 배타성을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만이 참이라고 믿는 기독교신앙은 기독교회나 기독교인을 특권화하거나 절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기독교회나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극한적인 자기 비하와 자기 비움을 실천한다. 배타적인 진리 실천과 신앙을 확보하기 위한 배타적 유일신신앙 주창인 셈이다.

   

기독교신앙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만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배타적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지키려고 하는 그 배타적인 진리 자체는 세상 만민들에게 자기를 비워 스스로 가난케 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하는 하나님만이 인류가 믿어야 할 진리임을 보여 주려는 데 전력투구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던 313년경에 밀라노칙령을 선포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는 밀라노칙령의 결구가 보여 주듯이 기독교신앙의 배타적 통일성에 기대어 제국의 통합과 안정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들은 자기 부인의 영성, 이웃 사랑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대표했던 기독교 영성을 통해 로마제국의 정신적 부패를 치료해 보려고 했다.

    

기독교신앙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십계명 1~3계명과 요한복음 14장 6절,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2절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과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표하고 계시하는 유일하신 중보자(요 1:18) 나사렛 예수의 배타적 지위를 선포한다. 예수님의 배타적 하나님 친자 의식은 자신의 특권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기 복종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백이었다. 기독교의 일차적인 배타성은 타종교를 무시하고 배척하라는 야만적인 배타성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교회 자신의 배타적․일편단심적인 충성심을 유발하는 배타성이다. 교회의 배타적 진리 주장은 자기 복무적(self-serving)이 아니라 타자 지향적이며 온 세계의 유익을 위한 배타적 진리 주장이다.


결론


성경적 기독교는 다채로운 이미지를 표출한다. 절대 복종, 자기 비움, 하나님의 배타적 계시, 세계 경영(통치)적 비전 등이 기독교라는 용어 안에 혼효(混淆)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배타성은 가장 겸손하고 가장 진실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기 위한 자기부인을 위한 배타성이다. 참된 성경적 배타성은, 온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한 배타적 자기 다짐을 의미한다. 타자 배제적인 배타성이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배타성이다. 그리스도의 배타적 주장이 참된 진리를 파수하고 구현하기 위한 배타성이듯 참된 기독교의 배타성은, 종국에는 온 세계 만민에게 공의를 구현하고 겸손한 자기 부인의 영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부단한 감동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진리의 증인, 예수 모방적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기독교적인 것은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의 결과가 아니라 배타적인 기득권 사수, 종파적인 확신 사수, 권력과 돈의 사수, 영토와 명예 등의 취득을 위한 배타성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기독교/기독성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죽기까지 복종시킨 자기 부인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니라 온갖 이유로 교회의 권력자가 된 자들에 의해 대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기독교회가 과연 참다운 그리스도다움을 대표하는지 늘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2000년 교회사, 120여 년의 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독교도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이 부족신(tribal god)적 협애함을 대표할 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초상권을 강탈한 종교 권력자들은 인류의 유익을 위한 배타적 주장을 자기의 욕망을 위해 도용했다. 자기 비움이나 희생,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자기 소모, 자기 해체, 자기 부인이 아니라, 혈과 육의 권력 집중, 권력 영속화를 위해 기독교의 배타성에 호소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시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행 11:26)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에 대한 국외자의 반응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인 충성심은 겉으로 볼 때 주류 문화를 보이콧하는 종파주의적인 완고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라는 초대교회의 단편 문서(곤잘레스, 기독교사상 I)를 보면 기독교인의 배타성은 자기희생을 다그치는 배타성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비티니아의 총독이었던 소플리비우스의 황제 수신 보고서에도 잘 드러나듯이 기독교인들이 따로 모여 맹세하지만 사회적 미풍양속을 해칠 만한 맹세는 전혀 없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자발적 고립화와 주류 동화 거부는 로마 대중들의 편견과 증오심을 촉발시켰으나 이성과 양심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탈선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나나미의 증언). 기독교적인 배타성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에게 엄청난 부담감(윤리적 신앙적)을 안겨 주는 말이다. 기독교적 배타성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할 사명감에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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