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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Dear Diary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영적 폭력

 성령의 수줍음

 표적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침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와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성령 운동이 잘못되는 근본 원인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부활의 영광과 능력만을 추구하는 데 있다. 

 니체는 솔직하게 무신론의 이름으로 권력을 추구했으나 현대 교회는 유신론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투철한 명분을 내세우며 권력을 지향한다. .... 현대 교회는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을 이용하여 권력의 욕망을 성취함으로 니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슈퍼 교회'로 등극하였다.  

  
 최근 성령 운동에서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이다. ... .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그분의 하나의 도구나 인간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인간을 신격화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셩령 체험의 삼박자.
 성령 체험의 내용은 무엇인가? ...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과 교제다. 성령을 체험하면 삼위 하나님과 함께 나와 너를 체험하게 된다. 곧 하나님과 너와 내가 연합하는 천국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함으로 우리는 옛 자아의 실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한다 ...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매일 체험하지 않으면 부활의 능력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유일한 비결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월요 치유 집회 방문기.

 즉흥적으로 떠오른 감동이나 인상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어떤 확실한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성급하게 선언하는 것은 진리에 근거한 담대한 믿음이라기보다 오류의 위험성을 무시해 버리는 경솔한 믿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행위가 갖는 위험성은 사람들이 그런 사역자를 하나님과 직통하는 신비하고 영험한 존재로 우러러보게 된다는 점이다.
 ...
 손 장로는 설교가 끝난 후 모두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그러고는 아무도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기도도 하지 말라고 했다. 갑자기 교회당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는 한 손을 들고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더! 터치!" 라고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했던 회중 가운데 일어섰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퉁퉁거리며 들려왔다. .... 한쪽에서는 어떤 여자가 괴성을 지르며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고, .... 한 할머니는 발작과 비슷한 증상을 일으켰다. .... 이것이 바로 이 집회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늘의 터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은 원래부터 기적은 없었다고 보는 반면, 보수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목사들은 대개 성경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났으나 지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 현대의 은사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이 지금도 그대로 재현된다고 주장한다.  .... 성경을 통해 화합해야 하는데 서로가 성경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니 그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성경 시대의 치유

 지금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는 여호와"로 소개하셨다. .... 구약에 부분적으로 실혐되었으며 미래에 온전히 성취될 치유는 전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치유다.
 우리는 이런 구약적인 배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드리거늘 ...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룰,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함을 점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하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며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바로 구약의 선자자들이 대망했던 메시아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공관복은 저자들이 예수님의 병 고침 사역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 주님이 전하신 복음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오래 대망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와 회복이 임했다는 메시지였다. ... 그러므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사탄의 세력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했다는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
 주님의 사역은 우리를 전인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전인적으로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 시대의 치유와 오늘날의 치유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치유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는가? 
 ...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과 ... 진정성을 증명해 주는 표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적인 치유도 사도적인 권위와 메세지를 입증하는 역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기에 사도 시대가 끝나고 성경의 계시가 종료됨과 동시에 이런 은사도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들(사도)이 세운 터 위에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지, 그들처럼 터를 다시 닦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계시로 받은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그들처럼 계시를 받을 수는 없다. 

  ...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교인들은 성경 말씀보다 오늘날의 '사도들'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예언에 더 의존한다. ... 존 스토트가 지혜롭게 조언했듯이 '사도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까? 

  ... 오늘날 치유의 기사가 희귀해전 것은 교회과 처음 열심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가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는 꼭 성령의 역사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교회의 발전 단계에 따른 순리적인 현상일 수 있다. 
 
 ... 교회의 그 표적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말씀과 성령의 풍성한 임재가 구체적으로 실현됨에 따라 외적 표징인 치유의 기적들이 줄어드는 듯하다. .. 이는 외적인 표적을 추구하기보다는 말씀에 더 의존하는 믿으로 살게 하시려는 성령의 섭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왜 많은 사람이 고침받지 못하는가

  ... 우리 교회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종말론적인 긴장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교회는 성령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그 안에서 종말론적인 회복과 치유의 능력을 미리 맛본다. 하지만 교회가 이 땅의 현실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는 부분적일 뿐이다. 천국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
 현대 치유 사역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종말보다 이미 실현된 종말에 과도하게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곧 미래의 궁극적인 축복보다 이 땅에서의 평안과 건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때때로 하나님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병과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더 많은 영적인 질병, 교만과 방종을 치유하시고 영적 성숙의 밑거름인 겸손과 인내를 배양하신다.


 영적인 사기

 ... 성공한 치유 실적뿐 아니라 실패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보도해야 한다. 탁월한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알려진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윔버도 ... 대부분 비교적 쉽게 낫는 신경성 질환이나 소화기 계통의 병들이 치유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치유 사역의 지침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림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하늘의 언어

 김우현 씨의 책은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제시나 기본적인 신학적인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
 ... 사람들은 속성으로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원한다. ...

 김우현 씨가  말하는 방언 체험의 유익은 가히 환상적이다. 방언만 체험하면 오래 계속되는 영적 침체에서 확실하게 벗어나고, 자신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 이런 가르침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조장한다. 거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누리기를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방언을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큰 소외감과 성처를 안겨주며 또한 그들을 은혜 없고 영적 결함이 있는 교인으로 보는 무례를 범한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I really doubt this -_,- too conclusive)

 ... 그래서 그의 책에서 방언에 대한 바울의 메세지를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바울이 염려했던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이 책을 쓴 옥성호 씨는 .. 방언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하였다. 
 그는 ... " 말씀을 향한 또 하나늬 사탄의 공격"으로 보았다.
 
 김우현 씨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언을 하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은사가 아니라 가장 남용될 가능성이 높은 은사로 보았다.

 옥성호 씨는 방언과 예언이 다 폐하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바로 성경이 완성될 때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 이런 해석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기보다 '은사중지론'의 안경을 끼고 읽은 것이다. ... 사랑은 더 큰 은사가 아니고 은사를 사용하는 더 좋은 길일뿐이다. 다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탁월하며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나 예언과 방언은 종말에는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김우현 씨는 방언의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남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면, 옥성호 씨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방언의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순수한 의도를 잘못 받아드려서 낙심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앙은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에 터와 규범이 되기에 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 그러나 하나님을 체험함에 있어서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것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옳지 않다.
 ...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다면 그 전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의 임재와 사역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 이 문제는 성령을 이해하려 할 때 교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이다.

 
 구약에도 계셨던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신구약 전체에 걸쳐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셨다. 이것이 오순절 전후 성력 사역의 동일성이다. 성령은 삼위 일체의 영으로서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 선지자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이 계셨다고 증언한다. ... 그분을 편의상 요한의 언어로 '말씀'이라고 칭할 수 있다. ... 새 언약의 성취를 예언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사역하셨을 때에는 육신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령으로 역사하셨다. ... 제자들이 이런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이다.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다면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 즉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의미한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되는 구속 사역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기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 성령은 동일한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이제 구속사가 완성됨에 따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영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함께하시는 영이 되셨다. 
 

 지금도 성령의 불세례를 기다려야 하는가

 오순절 전과 후의 성령 사역의 근본적 차이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점이다. ... 그러므로 그들이 중생 후 성령을 받은 것을 그들이 처한 특수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즉 ... '시대 전이적 시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경험은 오순절 후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성령 체험의 정상적인 규범이 되지 못한다.

 ... 그러므로 성령이 다시 우리에게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돌이켜야 한다. 세상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삶으로 오랫동안 성령을 근심시킨 삶에서 돌이켜야 한다. 물세례 말고 성령의 불세례를 방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물세례의 참된 의미를 회복해서 삶 속에 구현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서로 별개의 체험으로 볼 수 없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을 받고 그 내적인 실체를 물세례르 통해 외적으로 인 치는 것이 성경이 제시한 규범적인 패턴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세례의 참된 으미가 퇴색되어 실제 상황에서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체험하는 것 사이에 심각한 괴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을 당연한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이 규범에서 벗어난 사례가 딱 한 군데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다. ...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와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셨다.

 이 사건은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구석사의 큰 틀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주역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들보다 더 혐오하고 경멸했던 특종 인물들, 즉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에 예루살렘 교회와  상관없이 별도로 성령이 임하셨다면 ... 초대교회는 출범한 지 얼마 안되어 서로 다른 전통과 배경을 주장하는 두 분파, ... 로 나뉘게 될 위험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성령 체험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체험이다. 이 체험은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혁신이 일어나게 한다. 이 땅에 속한 옛 정체성이 죽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다.

 성령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 지극히 사랑받는 자이며 소중한 존재라는 의식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끊임없는 성취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자치를 인정받으려는 집여한 욕구와 수고에서 자유하게 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어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하심을 뜻한다. 성령 대신 우리가 우리의 삶과 소유의 주인 행세를 하는 한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실 수 없다. 성령은 온유하신 분이시기에 강압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시기 위해서는 자원하여 우리 자신과 모든 소유를 주님께 양도해야 한다. 성령은 자기자랑, 자기과시, 자기만족, 자아도취와 같은 자기중심적 성향을 날카롭게 대적하신다.

 진정한 목마름은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산물이다. 오히려 종교적인 야망에 의해 자극된 갈증이 사라질 때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목마름이 생긴다. 성령은 목마르게 하는 생수이시다. 목마름 자체가 성령의 은혜다. ... 목마름은 성령 충만의 앞부분인 셈이다. 그 뒷부분은 채워짐이다. 목마름과 채워짐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에서 한 짝을 이룬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만할 때가 이니라 입을 티끌에 대고 회개할 때이다. 외적 성장을 자축할 때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을 애통해야 할 때이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지 깊이 자성해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경험하고 이 은혜 없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과 교회를 위한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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